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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보는 교양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120회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by 생각하는 마이쮸 2024.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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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 암흑 도시

지금의 익산역이 예전에는 이리역이었다. 이리역은 당시 철도 교통의 중심지이자 이용객이 서울역 다음으로 많았다. 폭발음이 들리고 건물의 천장은 날아가고 유리는 모두 깨졌다. 이리마을은 전부 소등이 되었다. 

 

굉음이 들린 곳으로 가보니 기차 바퀴(300kg)가 기차역에서 1km 밖에 놓여있었다. 기차역에서 무슨일이 생기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리역에 몰려들었는데 군경들은 2차 폭발이 있을 수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 생존 전쟁

이리역에서 가까이 있던 삼남극장은 공연으로 사람이 많았는데 갑작스러운 폭발로 그곳은 전쟁터와 같았다. 삼남극장의 지붕은 무너져 사람들 위를 덮쳤다. 그날 삼남극장에서는 100여 명의 주상자과 7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리역의 폭발 사고를 모르고 승객 600여 명을 태우고 기차 한 대가 이리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기차는 서울발 남원행 101 특급열차였다. 특급열차는 이리역 바로 전 역인 황등역에 도착했다. 원래 특급열차는 작은 역은 무정차 통과하는데 황등역에서 정지 신호를 본 기관사는 황등역으로 연락을 한다.

 

 

 

왜 정지신호가 뜬 건지 묻는데 이리역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무슨일이 생긴 거 같다고 한다. 이럴 때 규정상 다음 역 신호가 나올 때까지 저속운행을 해야 한다. 기관사는 규정대로 저속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리역을 1km 앞둔 지점에서 깜깜해서 앞이 보이지 않아 열차를 세웠다. 기관사 영시 씨는 기차에서 내려 이리역으로 걸어가는데 이리역은 불타고 있었다. 영시 씨와 600여 명의 승객은 5분 차이로 큰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사고형장에 열차는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고 선로에는 직경 30m 깊이 10m 웅덩이가 파여있었다. 이 사고가 국내 최악의 폭발사고로 불리는 이리역 폭발사고이다.

 

이 사고로 부상을 당한 사람은 1,400여 명이었다. 공식적인 사망자는 59명이었다. 폭발 현장 반경 500m 내 집과 건물 대부분이 붕괴되었고 반경 4km내 집과 건물은 일부가 파손되었다. 그리고 반경 8km 내 건물 대부분의 유리창은 깨졌다.

 

| 폭발의 진실

나기자는 대합실에서 수상한 남자는 발견하는데 그는 화약 호송원 신씨였다. 당시 신 씨는 맨발에 새 신발을 신고 있었고 넋이 나가보였다. 나기자는 신 씨와 폭발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다방으로 그를 데려가 물었다.

 

신 씨는 당시 최고의 화약 회사의 직원이었는데 이 화약회사는 1977년 당시 15개의 계열사와 200억 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 씨의 임무는 인천에서 광주까지 기차로 화약을 배달하는 것이었다.

 

기차에 가장 많이 실린 화약품은 바로 다이나마이트였다. 다이너마이트는 도로나 건물, 철도 등을 건설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당시 신 씨가 운반하던 다이너마이트는 22톤이 있었고 기타 화약품을 합치면 총 1,250 상자, 30톤 분량이었다. 

 

기자 : 폭발 원인은 무엇인가요?
신씨 : 출발 대기하던 중, 저녁을 먹으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났습니다. 화차 안에는 인화물질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불이 났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기자 : 사고 전, 후엔 뭘 했나요?
신 씨 : 이리역 앞 식당에서 술과 저녁을 먹고 화차로 접근하는데 열차 문이 열려있었고 폭약 화차 부근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기자는 설득 끝에 신 씨를 경찰에 넘겼고 수사팀은 조사를 시작했다. 수사팀은 원인을 밝혀냈는데...

 

# 첫 번째 단서

이리역 생존자의 증언 : 폭발 직전에 철로에 아무것도 없고 고요했는데 갑자기 화차(화물열차)에서 어떤 사람이 맨발로 뛰어나오면서 '불이야'하고 외쳤다고 한다.

 

# 두 번째 단서

신 씨가 입고 있던 옷 : 소매 끝에 촛농이 묻어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한잔하고 돌아와서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는데 뜨거워서 깨보니 불이 나 있었어요.

 

 

 

| 사건의 전모

신 씨는 열차 대기 중에 옆 근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적당히 취한 신 씨는 화약 열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 씨는 화물칸 가운데 침낭을 깔고 누웠다. 그의 옆에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원료 수십 상자가 실려있었다. 

 

어둡고 캄캄했던 신 씨는 머리 위에 촛불을 놓아두고 잠이 들었다. 잠시 후 타는 냄새와 뜨거운 열기에 잠을 깨보니 화약 상자에 이미 불이 붙어있었다. 침낭으로 불이 꺼지지 않자 '불이야' 소리를 치며 맨발로 도망을 친 것이다. 

 

신 씨는 화약회사에서 일한 지 7년째였는데 화약 열차에서 촛불을 켠 게 처음이 아니었다. 심지어 취사도구를 갖추어 놓고 밥과 라면도 해 먹었다. 신 씨는 화약 호송에 필수인 화약류 취급 면허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당시 화약회사에서 일하는 화약 호송원 중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약 회사 책임자는 구속이 되었다. 수사팀은 이리역 배차 담당자에게도 구속 신청을 했다.

 

| 지켜지지 않은 원칙들

인천을 출발한 열차는 두 시간 후 영등포에 도착했다. 영등포역에서 10시간 가까이 대기 후 다른 화물 열차에 연결되었다. 그렇게 대전까지 가고 대전역에서 2시간여 대기 후 또 다른 화물 열차에 연결되어 이리역으로 온 것이다. 

 

화물열차는 11월 10일 밤부터 22시간 가까이 이리역에 정차해 있었다. 철도 운송 규정상 위험한 화약류는 되도록 빨리 목적지까지 운송시켜야 한다. 하지만 화약 열차를 약 48시간째 방치를 한 것이다. 

 

화물열차를 오랜 시간 정차시킨 이유는 급행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행료는 비공식적인 관행으로 당시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 존재했다. 

 

호송원, 화약회사, 일부 부조리한 직원들 등 원칙을 무시한 모두의 무책임이 불러온 참사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공식 사망자에서 신원 미상의 희생자들은 제외시켰다. 그리고 이리역 주변은 많은 타지 사람들이 머물다는 가는 곳이었고 역 근처에는 홍등가에서 일하던 여성들(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된)이 있었다. 

 

| 희생 뒤 세워진 원칙

담당 검사는 신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성물건파열치사상죄를 적용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미필적 고의
어떤 행위로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

 

화약회사의 사장은 1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는 벌금 20만 원으로 감형되었다. 민심을 의식했던 화약회사 사장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이리 시민들에게 피해 보상을 위해 90억 원을 내놓겠다고 한다.

 

운송 재개와 함께 화약회사에 시정조치가 내려지는데..

 

《시정조치》

- 화약을 적재할 때는 화역취급면허 소지자를 입회시킨다.

- 화약을 실었을 때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고 임검을 받는다. 

- 호송원은 2명을 태우되, 1명은 화약류 취급 면허 소지자, 1명은 청원경찰로 한다.

- 호송인에게는 반드시 소화기를 휴대시킨다.

 

| 이리 살리기

박정희대통령은 새 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실행시킨다. 도로를 확장하고 아파트를 지었는데 5층짜리 23동 1,150 가구였다. 이 아파트는 단 7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당시 복구 작업에 동원된 인원만 26만 명이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생필품이 전해졌다. 전국에서 모인 성금은 총 6억 6천만 원이었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행정구역을 통합하면서 익산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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