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폭군이라고 하면 연산군을 많이 떠올리실 텐데요. 왜 연산군은 간신 임사홍의 한마디에 미쳐버렸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볼게요. 벌거벗은 한국사 89회 조선 최고 폭군의 탄생 비화에 대한 이야기 시작합니다.
조선 최고 폭군의 탄생 비화
임사홍은 그 성품이 간사하고 그 행실이 음험합니다. - 성종실록 -
임사홍은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소인 중에 더욱 심한 자입니다. - 연산군일기 -
임사홍은 나라를 망친 소인입니다. - 중종실록 -
연산군은 왜 간신 임사홍의 한마디에 미쳐버렸나?
임사홍은 17세의 나이에 소년등과로 화려하게 관직에 나선다. 풍천 임 씨의 가문을 일으킨 인물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이었다. 그러다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손녀사위로 임사홍이 낙점된다. 계유정난을 통해 세조가 집권한 이후 세조는 종친들의 적극적 지지가 필요했다. 그때 효령대군이 다른 종친들과 함께 세조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덕분에 세조 재위 기간에 효령대군 집안은 부와 권력을 누렸다.
1468년 세상을 떠난 세조와 왕위를 이은 예종까지 잇따른 죽음에 이른다. 22살의 임사홍은 14살 성종을 가르키게 된다. 어린 성종을 대신해 조선 최초로 정희왕후가 정사를 도맡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년 후인 1476년 드디어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정사를 보게 된다.
임사홍의 첫째 아들 임관재가 예종의 딸 현숙공주가 혼인을 하게된다.
성종 6년 1475년 10월 어느 날 최한정이라는 한 관리가 추천을 받아 임용이 되는데 임사홍이 최한정을 예문관으로 임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성종에게 주장한다. 26살이었던 임사홍은 최한정이 나이도 50살로 많은데 이제 와서 학문을 습득한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자 최한정은 성종을 찾아가 임사홍이 자신을 비난하니 사직하겠다고 한다.
조정을 대신들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임사홍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임사홍은 국가 행사를 담당하는 예방승지를 맡고 있었는데 자신의 임무를 잊고 가만히 있었다. 이를 본 성종은 임사홍을 문책했다. 이를 본 임사홍은 성종에게 벌을 청하라고 하는데 임사홍은 이미 벌을 받았다며 청하지 않겠다고 한다. 동료 대신은 임금에게 벌을 청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임금에게 청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임사홍은 임금에게 벌을 청했다.
눈엣 가시였지만 왕실의 가족인 임사홍을 성종은 감싸주었다.
성종이 중전 윤씨를 폐하려 하는데 임사홍은 앞장서서 중전 폐위를 반대한다. 당시에는 중전 윤 씨가 별궁에서 근신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1478년 성종은 29살 임사홍에게 정3품 도승지 자리를 내린다. 소인 임사홍을 처벌해 달라는 언관들에 말에 성종은 그대들도 남 욕할 처지가 아니라며 임사홍을 편들었다. 그러다 현석규는 성종이 아끼는 관리였는데 현석규는 도승지였을 때 토론을 하던 중 상대방에게 욕설을 해서 탄핵이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1년 후 임사홍이 언관을 사주해 현석규 탄핵을 주동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자신보다 성종과 친하게 지낸 현석규를 질투했던 임사홍은 언관을 사주해 탄핵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성종은 격노했지만 왕실과의 관계 때문에 임사홍의 목숨을 살려주고 유배를 보낸다.
1486년 성종은 임사홍의 복직을 명하지만 대신들은 사직서를 던지며 이를 반대한다.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 성종은 임사홍의 복직을 취소한다.
1496년 7월 연산군은 즉위를 하면서 공신 자제들의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임사홍도 포함되어있었다.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1년 후 연산군은 명을 철회한다.
임사홍의 막내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희숙옹주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임숭재는 연산군과 절친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임사홍은 아들 임숭재를 통해 복귀를 하려고 시도했다.
1503년 마침내 54세에 임사홍은 오랫동안 갈망하던 어명을 받고 조정에 다시 복귀한다.
1504년 3월 19일 밤 연산군은 임숭재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임사홍이 찾아온다. 임사홍은 연산군을 보자마자 울며 폐비의 일이 원통하다고 한다. 임사홍은 성종의 후궁 엄숙의와 정 소용이 전하의 모후(연산군의 친모)를 중상모략해 폐비하게 됐다고 고한다.
이를 들은 연산군은 피의 복수를 다짐하고 폐비 윤씨를 중상모략한 성종의 후궁들을 때려죽이고 시신으로 젓갈을 담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폐비 윤 씨의 폐위를 동조하거나 방관한 조정 신료들까지 죽여나간다.
갑자사화
1504년 갑자년에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
이때 죽거나 유배당한 이들만 무려 200여 명에 달한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자의 목을 잘라 효수하는 부관참시까지 저지른다. 조선의 피로 물들인 갑자사화의 원흉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임사홍은 26년 간 쌓아온 원한을 갑자사화를 통해 복수했다. 그리고 조정에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로 임사홍은 정2품 병조판서 관직에 오른다.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한 시를 쓴 임희재를 죽이려하는데 아버지 임사홍은 임금에 뜻대로 하라고 한다. 아들 임희재는 능지처사로 죽던 그날 임사홍은 지인들을 불러 술과 고기를 먹으며 연회를 즐겼다. 연산군은 임사홍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 확인했는데 임금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임사홍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연회를 열어 임금에게 보여주었고 한편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는 아들 임희재를 끊어내었다.
사냥을 즐겼던 연산군을 위해 임사홍은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내쫓았고 금표를 세워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모르고 들어온 백성이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
임사홍은 연산군에 대한 충성심을 더 보이기 위해 전국에서 미녀들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한다. 연산군은 이 일을 임사홍 부자에게 맡긴다. 임사홍 부자는 미녀라면 기생, 유부녀, 처녀를 가리지 않고 뽑아갔다. 이렇게 뽑혀 궁으로 간 여인이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임사홍 영혼의 파트너 아들 임숭재가 돌연 사망한다. 임사홍은 정2품 이조판서에서 2개월 만에 정승아래 좌참찬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1506년 9월 2일 칼을 든 10여 명의 군사들이 임사홍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리고 임사홍은 살해당한다.
연산군의 폭압을 멈추기 위해 신하들이 중종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반정군이 연산군보다 먼저 찾아간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3년 만에 추락한 것이다.
반정군은 반정 20여 일 후 임사홍을 부관참시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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