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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보는 교양

꼬꼬무 116회 줄거리 '황태자와 찰리채플린'

by 생각하는 마이쮸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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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957년 8월 경북 경주의 한 다방을 찾은 경주 경찰서장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난다. 스무 살 갓 넘어 보이는 청년은 서장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나 이강석이오" 이기붕 의장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된 이강석은 당시 대한민국 3인자이자 대한민국의 황태자로 불리곤 했다. 암행시찰을 하기 위해 왔다는 이강석 얘기에 경주 경찰서장은 황송해했다. 하지만 자신이 고개를 조아리던 이강석이 가짜라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가짜 이강석 사건

 

이강석은 이기붕 의장의 장남이다. 1957년 3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82번째 생신이었다. 이기붕 의장이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장남을 선물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강석을 양자로 입양한 것이다. 자식이 없던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이기붕이 장남을 입양 보낸 것이다. 이승만과 이기붕은 정치적인 관계를 넘어 가족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강석을 대한민국의 황태자라고 불렀다. 이강석은 간부 교육을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을 했다. 그런 이강석이 불쑥 경주에 나타났다.

 

이강석은 경주 경찰서장에게 경주지방 수해 상황도 살피고 지방관리들의 비리도 내사할 겸 비밀리에 방문했다고 한다. 서장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모시는 이분이 이강석이 아니라 가짜라는 사실을...

 

| 가짜 황태자 강성병

이 청년의 이름은 바로 강성병이다. 강성병은 연이어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집안 형편도 급격하게 나빠졌다. 떠돌이생활을 하던 강성병은 이강석이 양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석을 행색을 하면서 부패 관료들, 관료 시스템에 충격을 줘야 했다고 생각한다.

 

강성병은 평소 이강석을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이강석 vs 강성병

 

강성병은 고등학교 때 연극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강성병은 이 기회에 대단한 연극을 하기로 한 것이다. 경주 경찰서장은 진수성찬을 대접하고 불굴사를 관광시켜 주고 선물도 주었다. 

 

사람들을 속이는 강성병은 한편 웃기기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왜냐면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자신을 체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성병은 수재민을 도우려고 하니 돈을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그렇게 수십만 환을 받는다. 강성병은 그렇게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강성병을 혼자 두지 않았다.

 

| 끝나지 않는 위기

대구로 향하고 있는 강성병의 지프차를 안동 지역의 박준장이 세운다. 그는 이강석이 군 간부 교육 시절에 교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들키는 줄 알았던 강성병에 박준장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었다고 한다.

 

 

 

강성병은 경북도지사 관저로 가게 되는데 당시 도지사는 수해복구를 지취 하느라고 현장에 나가있었다. 이강석이 왔다는 얘기에 관저로 뛰어간다. 멀리서 강성병을 본 도지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이강석과 동기인 아들을 불러 이강석이 맞는지 왜 왔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강성병을 본 도지사의 아들은 저 사람은 이강석이 아닌 가짜라고 한다. 강성병은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그렇게 사상초유의 사기극은 3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이 사건은 기사가 나고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된다.

 

| 채플린의 공판

강상병의 공판이 있는 날 인파가 천명이나 모여 법정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강성병이 관리들의 비리를 말하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한테 속은 고관들이 당신은 시국적 악질범이니 엄중 처벌해 달라고 했다는데요?"

이에 강성병은 "내가 시국적 악질범은 나에게 아첨한 서장과 군수들은 시국적 간신배들이오!?"

 

당시 1957년은 자유당의 위세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강성병을 통해 마음껏 비웃을 수 있었다. 

 

강성병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는다. 명예를 실추시킨 서장과 고관들은 모두 징계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큰 공을 세웠지만 10년 넘에 집권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3년 후인 1960년 3월 15일 정 부통령 선거가 열리는데 이 선거는 훗날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불린다. 이승만 박사는 이때 이미 3선을 했고 4선에 나섰고 자유당 후보 상대는 이기붕이었다. 이강석의 두 아버지는 나란히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자유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두 사람 모두 당선되어야 했다. 당시 85세였던 이승만이 만약에 사망하면 부통령이 이기붕이 되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두 사람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로써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된다.

 

부정선거를 목격한 국민들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서울시내에서 대학생 10만 명이 들고 일었다. 이날이 4월 19일로 4.19 혁명의 시작이다. 당시 경찰은 시민들을 상대로 총을 발포하며 무력으로 시위진압을 시도했다. 당시 사망자 186명, 부상자 6,259명이 발생했다. 

 

민주주의 사수하자!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라!

 

 

 

 

주한 미국 대사는 학생들의 시위는 정당했다며 학생 편을 들어줬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입장을 철회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겠다고 발표한다.

 

하야 성명이 발표되고 이틀 후 새벽 5시 40분 경무대에서 5발의 총성이 울린다. 

비극으로 끝마친 이기붕 씨 일가
저주도 회한도 잊은 망령의 길
양친을 먼저 쏜 다음 동생 그리고 자신을..
이강석 군이 비장한 최후를 결행

 

이기붕 일가 4 식구가 전부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양친과 동생을 소파에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있었고 이강석 군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이강석군은 가슴과 머리에 총을 쏘고 사망했다. 현장 조사 결과 일가족 극단적 선택으로 발표되었다. 

 

강성병은 가짜 이강석 사건을 기사 냈던 기자를 찾아가 자살한 이강석에 대한 조의를 표했고 세상을 비관해서 염세자살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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