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저항의 상징 레지스탕스'
|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 1945년 9월 2일)
히틀러에 의해 단 6주 만에 무너지며 유럽에 충격을 안겨준 나라는 바로 프랑스이다. 나치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이후 유럽 여러 국가를 점령하며 1940년 5월 10일 프랑스를 침공한다. 그리고 불과 6주 만인 1940년 6월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다. 이후 4년간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프랑스가 단 6주만에 나치 독일에 패한 이유는 나치 독일은 메서슈미트 Bf109* 800여 대의 폭격기로 공중에서 폭격했고 파일럿들에게 필로폰을 먹이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진격을 했다.
메서슈미트 Bf109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력기로 쓴 전투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은 프랑스의 자부심이 짓밟힌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 편에 서서 같은 프랑스인을 학살하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자유를 되찾기 위한 프랑스의 저항 운동이 벌어진다. 바로 레지스탕스*이다.
레지스탕스
'저항'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나치 독일의 점령에 대항한 저항 운동을 의미
레지스탕스는 패배 의식에 빠진 프랑스 국민의 저항 의식을 깨워줬다.
제1차 세계대전의 굴욕을 되갚아 주려 했던 히틀러
| 총길이 350km 철통방어 요새 '마지노선'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준비해 놓았다. 마지노선은 프랑스 전쟁부 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마지노선
프랑스가 나치 독일과 전쟁에 대비하여 프랑스-독일 국경에 설치한 대규모 요새 지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약 130만 명의 전사자가 나온 프랑스는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요새와 방어 설비를 강화했다. 당시 약 160억 프랑(한화 약 3조 5,000억 원)을 들여 350km에 달하는 대규모 요새 지대 마지노선을 건설했다.
마지노선 안에는 352개의 포대와 142개의 요새가 갖춰져 있었고, 통신센터, 보병대피소, 보급창고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군인 영국이 있어 든든했다.
연합군 전력 (151개 사단, 전차 : 약 3,500대 보유)
VS
나치 독일 전력 (1350개 사단, 전차 : 약 2,400대 보유)
나치 독일은 프랑스의 허를 찌르는 낫질 작전으로 프랑스를 공격했다. 나치 독일의 육군 지휘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세운 작전으로 나치 독일의 주력부대가 벨기에로 가는 것처럼 프랑스 군대를 유인한 후 나치 독일 구데리안 장군이 아르덴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의 배후로 진입 후 프랑스 군대를 포위하는 작전을 펼친다.
낫질 작전으로 나치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에 쉽게 성공한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은 연합군을 프랑스 북쪽으로 몰아 세워 됭케르크까지 몰았다. 연합군을 향한 나치 독일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위기의 순간 처칠은 함선을 총동원해 연합군 구출에 나선다.
됭케르크 철수 작전
됭케르크에서 33만여 명의 연합군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 대규모 철수 작전
됭케르크 철수 작전을 통해 약 22만여 명의 영국군과 11만여 명의 프랑스 군이 구출되었다. 하지만 4만여 명의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나치 독일은 됭케르트에 남은 연합군의 전리품을 모두 수거하고 프랑스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을 피해 피난을 떠난 피난민 수가 무려 800만여 명이었다.
Q. 프랑스 정부는 파리로 몰려드는 나치 독일군을 향해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요?
나치 독일군에게 무방비 도시를 선언한 프랑스
나치 독일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1940년 6월 17일 프랑스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요청한 프랑스의 전투를 끝낼 방법은 사실상 항복의 의미를 담은 휴전 협정이었다. 당시 프랑스 총리는 나치 독일은 너무 강해 보였고 국가적 피해를 줄이려면 휴전 협정이 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프랑스는 불과 6주 만에 나치 독일에 무릎을 꿇었다.
베르사유 조약 주요 내용
-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반환
- 연합국에 전쟁 배상금 1,320억 금 마르크 지불
- 프랑스 - 독일 접경지대 자르 분지 지역의 탄광 채굴권을 15년 동안 프랑스에 양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을 맺었던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맺자고 한다.
Q. 히틀러는 휴전 협정 체결을 위해 프랑스에게 더 굴욕적인 조건을 내거는데요. 어떤 조건이었을까요?
22년 전처럼 같은 기차에서 휴전 협정을 맺자고 한 것
프랑스는 휴전 협정을 기념하기 위해 콩피에뉴 숲 인근 휴전 박물관에 기차를 전시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승리를 기념하는 박물관 벽을 뚫어 기차를 꺼냈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을 주었는데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자유지역에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들어선다. 비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시 프랑스 체제였다. 비시 프랑스를 통치했던 사람은 히틀러와 휴전 협정을 제안했던 총리 필르프 페탱이었다.
비시 프랑스 (1940년 7월 ~ 1944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휴전 협정 체결 후 나치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정부
| 프랑스를 짓밟은 히틀러의 만행
① 나치의 상징으로 도배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은 물론이고 제1차 세계대전 승전기념비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까지 나치 깃발을 장식했다.
② 문화 예술품 약탈
에술품 수집 특수부대는 미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압류하거나 약탈했다. 나치 독일은 예술품 약탈을 쉽게 하기 위해 예술품 이동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예술품 수집 특수부대
제2차 세계대전 중 문화재 수집과 약탈을 담당한 나치당 조직
Q.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등 유명 작품을 가져가려 했던 예술품 수집 특수부대는 작전에 실패하고 마는데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루브르 박물관의 유명 작품들이 모두 사라진 것
프랑스는 점령당하기 전에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을 따로 보관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문을 닫고 관장의 지시에 따라 작품을 포장했다. 작품이 들어있는 총 1,862개의 나무 상자를 200여 대의 차량에 실어 전국 각지로 작품을 옮겼다.
하지만 프랑스 상류층이 보유 중이던 작품을 비롯해 총 2만 2천여 점의 작품이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의해 빼앗겼다.
히틀러가 뺏앗은 작품을 숨겨둔 곳은 오스트리아에 있는 소금 광산이었다. 히틀러는 소금광산이 숲 속에 있어 찾기도 힘들고 폭격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소금 광산 안에 약 8,000여 개의 작품을 숨겼다.
프랑스 총리 페탱은 나치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를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페탱을 신뢰했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치 독일에 순응하는 것이 프랑스와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③ 프랑스인들을 향한 탄압
히틀러는 빵의 제조는 줄이고 곡물도 법으로 제한하게 했다. 또한 프랑스인을 8개 등급으로 나눠 배급량을 통제했다. 나치 독일은 음식뿐만 아니라 연료마저 제한했다. 연료도 나치 독일군이 전쟁으로 사용해 석탄 배급제를 실시했다.
적은 양의 석탄으로 추운 겨울을 견뎌야 했고 자동차 대신 인력거와 자전거를 이용해야 했다.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과 협력자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자유를 위한 저항 운동 레지스탕스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나치 독일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 퍼져 저항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941년 8월, 파리의 지하철역 안에서 독일 해군 사관후보생이 레지스탕스의 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히틀러는 방침을 발표한다.
Q. 히틀러는 독일군 한 명이 피살되면, 이 방법으로 복수하라고 지시했는데요. 이 방법은 무엇일까요?
레지스탕스 혐의를 가진 수십 명의 프랑스인을 처형하는 방침
나치 독일은 보복으로 죽인 프랑스인은 약 860명으로 추정된다.
| 최악의 나치 독일 협력자 라발의 만행
나치 독일을 위한 독일 공장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프랑스 라발 총리는 프랑스인을 보내기 위해 광고를 했다. 당시 독일에는 약 180만 명의 프랑스 포로가 잡혀있었는데 프랑스인 3명을 노동자로 보내면 포로수용소에 있는 프랑스 포로 1명을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나치 독일과 협상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고 지원을 안하자 라발은 강제로 노동자들을 보내기 위한 법을 발표한다.
의무 노동제
만 18세부터 50세까지 모든 남성과 만 21세부터 35세까지 독신 여성은 노동자로 징발한다.
의무 노동제로 인해 수많은 프랑스 청년들이 나치 독일의 군수 공장으로 떠나야 했다. 의무 노동제에 불복 시 3~5년 징역을 살거나 최대 10만 프랑(약 2천만 원)의 벌금을 내야 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로 끌려간 프랑스 노동자는 역 65만 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무장활동을 벌어기 시작한다. 독일 공장 대신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는 인원이 증가했다. 그들은 접근이 어려운 산악 지대에 은신처를 마련했고 나치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사격과 수류탄 투척 훈련을 했고 폭발물을 제조해 나치 독일군의 군사 시설을 폭파했다. 그리고 고압선 철탑을 파괴해 전기를 끊거나 독일군을 암살하며 저항을 이어나갔다.
나치 독일에 부역했던 비시 프랑스마저 나치 독일에 배신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까지 군대를 끌고 내려와 프랑스 전역을 점령한 것이다. 이렇게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이 히틀러 차지가 된 것이다.
1943년 가을 2만 5천 명 ~ 4만 명 사이로 늘어난 무장 레지스탕스 세력이 1944년 6월에는 10만 명 가까이로 늘며 레지스탕스 활동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드골의 등장!
샤를 드골을 프랑스에서 국방부 차관을 지낸 인물로 페탱이 나치 독일에 휴전 협정을 제안하자 다음 날 영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끝까지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샤를 드골
해외 레지스탕스 조직인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이자 이후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이 된 인물
이 때문에 샤를 드골은 사형 선고를 받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샤를 드골은 영국에 해외 레지스탕스 본부인 자유 프랑스를 창설한다.
- 프랑스 해방을 위한 샤를 드골의 레지스탕스 업적
① 자유 프랑스 창설
샤를 드골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 등 영국으로 온 프랑스군과 민간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어서 자유 프랑스 해군과 공군으로 나눠서 체계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레지스탕스 군대를 만들었다.
연합군과 함께 나치 독일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한 샤를 드골은 자유 프랑스로 연합군과 긴밀한 외교를 시도했다. 샤를 드골은 리지스탕스와 연합국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영국 정부와 비밀 첩보기관과 공조하며 레지스탕스에 무기와 자금등을 전달했다.
샤를 드골은 암살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
② 레지스탕스 사관학교
레지스탕스는 자유 프랑스 사관학교에서 장교로 육성되었다. 샤를 드골은 장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프랑스를 위해 싸울 것을 독려했다.
자유 프랑스군 장교들은 프랑스, 아프리카,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 전장으로 가서 자유 프랑스군으로 나치 독일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훈장을 받은 몇몇 장교들은 샤를 드골의 밀사로 활동했는데 밀사 중 약 60%가 임무 수행 중 사망했다.
장 물랭
샤를 드골의 밀사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핵심 인물
당시 장 물랭은 최연소 도지사였던 엘리트였다. 나치 독일의 명령에 불복했던 장 물랭은 도지사직에서 해임당하고 영국에서 샤를 드골을 만났다. 샤를 드골은 장 물랭을 프랑스로 다시 보내기로 한다. 150만 프랑(약 3억 3천만 원)의 자금을 가지고 낙하산으로 프랑스에 잠입한 장 물랭은 샤를 드골의 생각을 레지스탕스 세력들에게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레지스탕스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 신념에 따라 여러 조직으로 나뉘어있었다. 장 물랭은 프랑스 해방을 위해 통합한 조직 레지스탕스 전국 회의를 창설한다.
통합된 레지스탕스는 나치 독일 장군 암살 등 나치 독일군에 대항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무장 활동을 전개한다. 이렇게 레지스탕스 활동 규모는 확대된다. 사실 당시 나치 독일군의 전세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 10년 동안 침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불가침 조약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기습 침공한다. 그런데 1943년 2월 나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며 수세에 몰리게 된다.
나치 독일과 프랑스 협력자들은 프랑스 내부 단속을 강화하며 탄압 강도를 훨씬 높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레지스탕스를 잡는 조직 밀리스가 등장한다.
| 잔혹한 레지스탕스 헌터 밀리스의 등장
밀리스는 프랑스인들로 이뤄진 민병대 조직이다. 밀리스는 자백과 정보를 위해 레지스탕스를 끔찍하게 고문하고 레지스탕스 즉결 처형 및 암살로 악명이 높았다.
밀리스가 가장 많을 때는 약 3만 5천 명으로 추측된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사망한 역 3만 5천 명 중 4천 여 명은 나치 독일에 총살되었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을 끝낸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1944년 6월 6일 대규모 연합군이 투입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 프랑스 해방의 신호탄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년 6월 6일 나치 독일 치하의 서유럽 탈환을 위한 연합군의 비장의 한수였다. 총 약 210만 명의 병력과 1,200여 대의 항공기 5,000여 척의 함선이 동원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당시 노르망디는 나치 독일 점령지였지만 작전 성공 시 프랑스 해방의 시발점이 된다.
Q. 프랑스 저항 세력은 연합군의 요청을 받아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특별히 어떤 작전을 펼쳤을까요?
철로를 끊는 방법
나치 독일이 수세에 몰리자 1944년 8월 19일부터 파리의 나치 독일군을 향한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협공이 시작된다. 히틀러는 파리에 남아있는 나치 독일군에게 명령을 전달하는데..
파리를 연합군에 넘기지 마라
넘기려면 그전에 폐허로 만들어라
이 명령을 받은 사령관은 디트리히 폰 콜티츠였는데 그는 이미 진 전쟁이라고 판단하고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는 1944년 8월 25일 해방을 맞이한다. 이때 프랑스의 해방을 처음 알린 인물이 바로 레지스탕스 대표 샤를 드골이었다. 샤를 드골의 레지스탕스 덕분에 프랑스는 당당히 승전국 지위에 오르게 된다.
| 해방된 파리에 입성한 드골의 화려한 컴백
- 히틀러 흔적 지우기
- 대독협력자 처벌법 제정
정식 재판을 통해 처벌받은 대독협력자는 약 9만 8천 명이었다. 약 9천 명의 대독협력자는 거리나 숲 속에서 처형되었다.
필리프 페탱은 사형선고를 받지만 89세 고령을 감안해 종신형으로 감형된다. 대독협력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라발을 음독자살을 시도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위세척을 통해 살려내고 총살형을 집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