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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118회 줄거리 '하나회의 시작 그리고 끝'

by 생각하는 마이쮸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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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117회 노인과바다 배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18회

- 하나회의 시작 그리고 끝 -

 

| 하나회의 시작

육사 11였던 전두환과 동기들은 정규교육을 4년을 받았다. 그전에는 전쟁 중이어서 6개월만 교육받고 임관을 하기도 했다. 육사 11기 생도들은 자신들이 정규 육사 1기라고 생각했고 부대 내에서도 그렇게 불렸다.

 

자부심이 남달랐던 육사 11기는 모임 하나회를 결성한다. 그리고 배신하면 자결해야 한다는 의미로 단도를 나눠가졌다. 후배기수에서 10명만 하나회에 받아들였다. 후배에 대한 뒷조사를 마치면 특정 장소에 불러 서약을 하게 하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그 조직은 얼마 안 가서 100명을 넘겼다.

 

군내 사조직은 군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나회의 비밀 유지를 할 수 있던 이유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3년 수경사를 이끈 윤필용이 하나회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하나회의 위기?

최고 실세 윤필용이 법정에 서게 된다. 사건은 한 술집에서 시작된다. 윤필용, 이후락, 신문사 사장 세 사람은 술자리를 갖는다. 술자리에서 각하의 건강이 걱정된다며 후사를 준비하는게 좋겠다고 한 얘기를 신문사 사장이 박정희에게 전한다. 

 

말 한마디로 윤필용은 박정희 눈 밖에 나면서 법정에 서게 된다. 법정에 선 사람들은 모두 징역형을 선고 받고 군복도 벗게 된다. 당시 수사로 윤필용 뒤에 하나회가 있다는 사실이 들키게 된다. 당시 수사 담당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하나회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강창성은 박정희에게 하나회의 조직과 명단을 넘겼다. 박정희는 조사는 여기까지 하자며 강창성을 돌려보낸다. 사실 전두환과 박정희는 인연이 있었는데 군사정변으로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이틀 후 육사생도들은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친다. 이때 전두환이 생도들을 설득하는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에 이어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자리까지 꿰찬다. 전두환을 옆에 두었던 박정희는 하나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불법 조직이었던 하나회를 보호하기 위해 박정희는 수사담당 강창성을 좌천시키고 수사를 중단한다.

 

| 하나회의 회장

하나회의 일인자로 등극한 전두환은 군맥관리를 시작한다. 전두환은 하나회의 진급을 위해 열과성을 다했고 비 하나회의 보직이 비면 하나회 회원으로 보직을 채웠다. 군인들에게 하나회는 진급 수직 상승의 지름길이었다. 1979년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보안사령부는 군 내 모든 정보를 주무를 수 있는 위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고 사망한다. 이제 최고의 권력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장군이 된다. 정승화 장군은 이 참에 하나회를 몰아내고 군 체계를 바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운다.

 

 

 

| 하나회의 12.12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 하나회의 계획은 연행조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동시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는다. 그다음은 육군본부와 국방부 그리고 중앙청을 점령한다. 

 

7시 27분 충격전 끝에 정총장이 연행이 된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반격에 나선다. 당시 하나회 회원이 한 명도 없는 부대는 9 공수여단뿐이었다. 그마저도 도청으로 반란군이 진압군보다 한 발 빨랐다.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규하 대통령은 정총장 체포 서류에 서명을 했다. 단 10시간 만에 반란군이 승리를 한다. 

 

12.12의 주역들은 모두 별을 달았다. 진압군이 잡혀간 모든 빈자리를 하나회가 차지했다. 보안사령관 자리를 노태우에게 물려준 전두환은 군복을 벗고 1980년 대통령에 취임한다. 

 

| 하나회의 전성시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으로 땡전뉴스가 시작되었고 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스포츠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군사정권의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37년 만에 통금을 해제했고 학생들의 교복, 두발 자율화를 조치했다. 

 

허화평은 5공의 브레인으로 허삼수는 해결사가 되어 청와대에 입성한다. 장세동은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았다. 군의 모든 요직은 하나회의 전용 코스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는 7년 이어 노태우 대통령이 5년을 집권했다. 

 

 

 

| YS의 3.8대첩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순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 뺏지는 못해!

 

선거를 앞두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과 합당을 한다. 김영삼은 14대 대통령으로 그 당에서 당선이 된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고 3월 8일 오전 7시 30분 군의 보직을 전면 교체한다. 그리고 단 4시간 만에 별 7개를 떨어뜨린다. 한 달도 안돼서 특전 사령과, 수방 사령관까지 교체했다. 이때 떨어진 별이 6개이다. 그리고 다섯 번에 걸쳐 군 핵심 요직의 하나회 멤버들을 교체한다.

 

당시 하나회는 육사 22기에서 맥이 끊겼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조선일보 기자가 36기까지 하나회 멤버가 있다는 사실과 명단까지 입수한다. 조선일보 기자는 하나회 명단을 모두 공개한다. 

 

| 하나회의 끝

1993년 4월 2일 서울 동빙고동 군인 아파트 곳곳에 수상한 전단이 뿌려져 있었다. 전단에는 육사 하나회 회원 20기부터 36기까지 하나회 명단이 적혀있었다. 하나회 명단 살포자는 육사 31기 비하나회 대령이었다. 

 

두 달 동안 김영삼 대통령이 떨어뜨린 별만 60개였다. 그 뒤는 하나회 척결은 국방부로 넘겨진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하나회가 주도한 12.12사태도 다시 조사하라는 의견이 올라온다. 이때 하나회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 사람이 있는데 강창성 국회의원이다. 군복을 벗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는데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교도소에 가게 된다. 전두환의 보복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전두환과 노태우 포함 신군부 세력 38명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된다. 결과는 기소유예가 나온다. 여기서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조사 자체가 거절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면서 첫걸음으로 5.18과 12.12사태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한다. 하나회 회장이자 전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나란히 법정에 섰다. 하나회 핵심 멤버들과 함께였다.

 

공판은 28번이나 진행되었고 최종판결은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 그리고 12.12 주역들도 최대 8년의 징역형이 부과되었다. 12.12 반란 혐의가 인정되었다. 

 

아홉 명 유죄 판결 후 모두 약 8개월 만에 사면되었다. 모두 특별 사면된 이유는 국민대화합이었다. 전두환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하나회의 회장이었다. 빈소를 찾은 하나회의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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